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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의 동행, 함께할 무한의 여정
홍경한 미술평론가
동시대 미술이 제아무리 미의 전복과 규정에 관한 이탈마저 폭넓게 수용하는 무한한 자비로움을 지니고 있다 해도, 예술의 본질은 어 쩔 수 없이 교감을 전제로 한 ‘공유’를 목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 것이 부자연스럽지 않게 우리네 삶 속으로 배어들 때 비로소 미술 은 제 기능을 다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삶과 호흡하는 예술’, 또는 ‘생활 속에서 발견하는 예술’ 실 천이란 그리 녹록하지 않다. 현대미술이 지녀온 추상적 개념을 구체 적으로 손에 잡히는 리얼리티로의 전환 자체가 그만큼 어렵기도 하 거니와, 엄연히 존재하는 관객들의 정서와 눈높이 간 간극은 지금도 유효한 탓이다. 따라서 예술 소통의 거리감을 고려한 기획은 중요할 수밖에 없으며 많은 이들이 미술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전 시는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일부 미술공간 및 문화공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생활 속 예술 전개를 시도해 왔고, 또한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때론 미 적가치의 향유와 확산이 가능하다는 스스로의 신뢰 아래 비전 있는 무대를 제공하거나 역량 있는 작가들을 찾아내어 소개한다. 나아가 관객들을 직접 예술창작에 개입시키거나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으로 이질감과 심리적 거리감을 희석시키려는 여러 방법론을 구사하는 등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 본질에 탐닉하는 태도 를 견지하고 있다. 특히 작품과 예술가에 대한 가치척도가 구매 민 주주의가 아닌, 공적 자산으로서의 평민주의라는 인식은 눈여겨볼 만하다. <세계일보>가 주최하고 더 트리니티(The Trinity)가 기획한 이번 전시 ‘동행(同行)’도 그 연장이다. 비록 전시 형식은 ‘기념전’이지만, 기획사 측은 각자의 영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예술가들로 변별 력 있게 구성했고, 창간 30주년을 맞은 <세계일보>는 기꺼이 무대 를 제공했다.이에 발맞춰 세 명의 참여 작가인 이외수, 강찬모, 이헌 정은 창간 30주년이라는 발자취와 미래지향적인 행보라는 취지와 목적에 맞는 다양한 작품을 출품했다. 그야말로 어울리지 않을 듯 조화로운, 3인 3색이 만들어낸 이채로운 전시다. 참여 작가인 이외수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문학인 이다.(필자도 그의 1997년 장편 『황금비늘』을 흥미롭게 읽은 기 억이 있다. 강원비엔날레가 열릴 당시 직접 비엔날레를 찾아 응원 의 메시지를 남기기도 하여 간접적인 인연도 있다.) 그런데 이번엔 말과 글이 아닌, 조형예술세계를 선보인다. 사실 미술도 그에겐 말 이자 글과 진배없지만, 혹자는 문학을 하는 이가 웬 그림이냐고 할 터이다. 허나 이외수는 1990년부터 최근까지 다양한 전시에 참여해 온 시각 예술가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선화(仙畵)는 이외수 작업 을 관통하는 필법이자 상징이며, 장르 간 병합을 이끄는 기의이다. 실제로 ‘동행’전에 출품한 작업들은 한 번의 호흡 아래 완성된 선 화의 필법을 유감없이 내보인다. <숲에는 바람>을 비롯해 <청심>, <도>, <대보름> 등에서 엿보이는 먹의 농담, 붓질의 강약에 따른 운율, 여백을 통한 사유의 미는 모두 힘 있고 정제된 그의 필법에 서 나온다. 이 가운데 한 마리의 물고기를 그린 <청심>은 선과 형상의 표현에 있어 흐트러짐 없는 미감을 보여준다. 문인화 특유의 시원한 공간 감이 살아 있다. 어쩌면 단지 하나의 생명체를 화면에 옮긴 것임에 도 평화로운 여운 가득 품은 여기의 흐름이 예사롭지 않다. 특히 여 백으로부터의 여울은 화면의 무게감을 소거하지 않으면서도 심연 에 대한 천착을 읽게 한다. 이런 흐름은 그의 여타 작품들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형상과 여 백의 조화는 감정의 거울이자 시공을 함축한 내면의 적용이랄 수 있 다. 가필 없는 획은 즉발과 충동이요, 이로부터 생성된 조용한 울림 과 침전된 격정은 단순하지만 깊이 있는 세계를 창조하는 조형원리 가 되고 있다. 다시 말해 폭발하는 듯한 즉발의 획과 특유의 화려하 면서도 이질적이지 않은 필의 운용은 삶에서 체감한 감정의 이입이 획과 순간적으로 교합하면서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리고 이 모든 것은 소리 없는 발묵(發墨), 순화된 묵필, 자연에 관한 철학적 사유라는 본질을 원천으로 한다. 이외수의 작품에서 동양철학을 배경으로 한 한국화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면 <선의 사랑>이나 <빛의 사랑> 시리즈, <하늘의 창> 등 의 작품을 발표한 강찬모의 산 시리즈는 강렬한 색과 형상이 먼저 눈에 띈다. 색이 공간 속에 안착함으로써 위용의 산이 모습을 드러 내는 그의 산 연작은 그저 외피를 옮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응축 된 에너지가 부유하고, 선연한 색과 대범한 구성을 통해 세계와 만나는 통로에 가깝다. 실제로 강찬모의 산, 그중에서도 히말라야는 단지 이미지로서의 산 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잇는 매개이다.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 에 대한 숭고의 의식이 담긴 산이며, 작가만의 시각으로 응축한 시 간의 조형이다. 또한 안에서 밖으로의 분출과 밖에서 안으로 거둬 들인 시각예술이면서 절망이 아닌 희망이 담긴 조형이다. 그렇기 에 우린 그의 산 연작을 보며 무언가에 대한 동기를 부여받고, 정갈 한 명상과 정제된 성찰 속에 자리한 나와 관계된 삶을 들여다본다. 한편 그의 산 연작은 비 시간적이거나 초시간적인 몰입의 순간이 산 으로 전이된 것이기도 하다. 거스를 수 없는 명제들과 침범할 수 없 기에 숙연해지는 것들, 하지만 깨달음을 심어주는 비옥한 신비성을 근간으로 한 산은 인간의 조우를 통해 존재론적 관점에서의 여정을 함축하기도 한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강찬모의 그림은 곧 자연과 인간의 합일에 가깝고, 만상의 언어로서의 예술 아래, 희망과 꿈, 환 희로 가득한 무한의 우주관을 밑동으로 한다 해도 무리는 없다. 또 한 비극적인 것보단 자유의 환영을 일깨우는 감성적 일면들이 어우 러져 생성된 결정체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이는 필자만의 생각은 아닌듯하다. 프랑스 평론가 장 루이 뽀와트뱅은 그의 작품에 대해 “하나하나의 작품은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의 이야기가 아니라 무한한 축제의 노래가 되었다.”라며 “단순 하고 선명한 색채는 강렬한 상징적 차원에서 구축되어 살아있는 감 성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방법이 된다.”라고 평했다. 나아가 그는 “각 작품은 히말라야 이후 만다라와 같은 효과를 전달하고 있다.” 면서 “명상의 기운 안에서 인간의 삶을 보다 낫게 하는 역할을 하는 전령의 역할과 같다.”고 말했다. 이헌정은 도예가이면서 설치미술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표현방식 은 다르지만 강찬모가 그러하듯 이헌정 역시 ‘도예’는 하나의 명상 이자 수행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 바탕 위에서 성립되는 설치는 고 귀한 노동을 예술의 연장에서 소화하는 과정이면서 자신만의 철학 을 담아내는 무대 역할을 한다. 필자는 과거 ‘더 트리니티’에서 전시할 당시 그의 작품을 비평한 적 이 있다. 그때 작성한 글을 일부 빌려오면 작품에 대한 이해가 수 월할 듯싶다. 일례로 필자는 당시 작가에 대해 일상에서 쉽게 발견 할 수 있는 사물들을 예술 내부로 끌어들이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 으며 누구나 하나쯤은 갖고 있을 법한 것들(자연물, 유리, 실, 가 구, 동물 등의 생명체와 각종 사물)을 작업의 매제로 삼는다고 적었 다. 때문에 복합적이고 산파적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그것은 곧 일 상이 곧 예술이요, 예술이 곧 일상이라는 해석 역시 가능하게 한다 고 해석했다. ‘동행’ 전에 선보이는 작품들도 그렇다. <Blue Vase>를 비롯해, <Box>, <House> 등의 작품은 여행이라는 주제에 천착한 결과물로 서의 ‘집’이다. 그런데 이는 그저 잠시 머무는 안식처로서의 집이라 기보단 인간 존재성에 대한 탐구로서의 장소에 가깝다. 사실 그에게 여행과 집, 인간존재에 대한 탐구는 ‘회귀’를 전제로 한 다. 그는 공간이 달라지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관점의 차 이는 곧 사유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음을 회귀라는 명사적 언어로 증거해 보인다. 이는 사고의 유형을 확장하는 것이자 사유의 여백이 달라짐을 뜻한다. 내적으론 ‘나’를 진실하게 바라보는 태도이자, 실 존에 대한 문제로 회귀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은 실존 에 대한 본질적 고민에 포박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견해는 그의 여러 작품들에서도 고루 발견된다. 이처럼 ‘동행’ 전에 함께하는 3명의 작가들은 저마다의 예술관과 조 형론을 갖고 있다. 문학적 감수성과 현대적으로 번안된 한국화를 출품한 이외수와, 침잠된 에너지와 명상성을 통해 세상의 기원에 대한 지평을 넓히고 있는 강찬모, 그리고 넓은 풍부한 조형성만큼이나 거 칠 것 없는 창의적인 작가로서의 족적을 남기고 있는 이헌정은 서로 다른 듯 하나의 길, 동행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건 바로 그 어떤 형식을 하더라도 예술은 결국 나와 세상, 개인 과 공동체, 내면과 외면의 적절한 만남이란 것이다. 예술은 세계로 부터 이탈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이고, 모든 예술은 세계를 탐 구한 결과이며, 단순히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본 것에 대한 반 응과 보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알게 되는가에 있다는 메를로 퐁티 (Maurice Merleau Ponty)의 주장처럼 말이다. |
이외수 LEE OI 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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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모 KANG CHAN 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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